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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골목길 모퉁이, ‘이야기가 머무는 집’이라는 작은 간판을 내건 서점이 있었다. 주인 강선우는 서점 이름처럼 늘 따뜻한 이야기와 웃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을 넘어, 동네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었다. "선우 씨, 우리 손주 녀석 읽을 만한 동화책 좀 골라줘요. 요즘 통 말을 안 들어서…." "아이고, 할머니 오셨어요? 그럼요, 요즘 딱 그 나이대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찾아놨죠! 잠깐만요." "선우 형, 저 이번에 면접 보는데… 혹시 정장 빌릴 만한 데 알아요?" "어이구, 우리 민수 취직하는구나! 걱정 마, 형 사이즈랑 비슷하니까, 내 거 빌려줄게. 세탁도 싹 해놨어." 선우의 서점은 ..
도시의 밤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희미한 불빛을 밝히는 곳이 있었다. 간판도 눈에 띄지 않는 골목길 모퉁이, ‘달빛 머무는 곳’이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전부인 카페였다. 이곳은 낮에는 굳게 문을 닫고 있다가,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문을 열었다. 주인장 민준은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밤이 되면 이 작은 공간의 주인이 되었다. 그가 왜 이런 이중생활 같은 밤 카페를 운영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굳이 묻지 않았다. 카페 안은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듯 고요했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 몇 개와 푹신해 보이는 소파 하나,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전부였지만, 공간을 감싸는 은은한 조명과 낮은 볼륨으로 흐르는 재즈 음악, 그리고 민준이 직접 내리는 커피 향이..
회색 빌딩 숲 사이를 빠져나가는 퇴근길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했다.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아이돌 음악도, 스마트폰 화면 속 시끌벅적한 세상사도 수현의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스물아홉, 딱히 불행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주 낡고 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전자음이 아닌, 나무 울림통을 타고 번지는 진짜 피아노 소리였다. 소리는 번화가 한쪽 구석, 낡은 상점들 앞에 놓인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허리를 조금 구부린 채 건반 위에 마른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 하지만 그 안에는..
서른을 갓 넘긴 지우에게 밤하늘은 그저 까만 도화지일 뿐이었다. 빼곡한 빌딩 숲 사이로 간신히 얼굴을 내민 달과, 그마저도 희미한 몇 개의 별. 어린 시절, 온 세상을 담은 듯 반짝이던 밤하늘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회색빛 도시의 소음과 고단한 하루의 무게만이 어깨를 짓누르는 밤이 반복될 뿐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지우는 생각했다. 풀벌레 소리 자지러지던 시골집 앞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아이를. 민준이. 세상의 모든 별을 다 셀 기세로 손가락을 꼽던 아이. 천문학자가 되어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며 눈을 빛내던 소년. 그리고 그 옆에서, 밤하늘처럼 까맣고 깊은 민준의 눈동자를 더 열심히 바라보던 자신을. “지우야, 저기 봐! 북두칠성! 오늘은 유난히 잘 ..
시간은 꼭 고장 난 시계 같았다. 2년 전, 민준이 곁을 떠난 그날 이후로 서진의 시간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거리엔 다시 연둣빛 새싹이 돋고 벚꽃 잎이 흩날리는 봄이 왔지만, 서진이 운영하는 작은 꽃집 ‘오늘의 꽃’은 여전히 한겨울의 스산함 속에 머물러 있었다. 꽃향기가 가득해야 할 공간은 늘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도 그녀의 텅 빈 눈동자에는 그저 흐릿한 색 덩어리로만 보일 뿐이었다. 꽃을 다듬고 물을 주고, 손님에게 건네는 모든 과정이 마치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처럼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었다.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는 그녀의 진짜 감정을 가리기 위한 얇은 막과 같았다. “서진아,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이러다 너까지 쓰러..
#1.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로 시간을 노래했다. 그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곳, 해변가 작은 카페 '파도' 앞에도 늘 그 자리에, 파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볕에 바래고 소금기에 절어 본래의 색을 잃고 하늘색에 가까워진 낡은 나무 의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살짝 삐걱거리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의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카페 주인 현수 씨는 그 의자를 일부러 밖에 내놓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잠시 쉬어가거나,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마치 그 자리가 제 운명인 듯, 의자는 묵묵히 수많은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내며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에는 유독 한 사람이 자주 앉았다. ..